• 최종편집 2024-05-02(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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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까지 절대적으로 멕시코를 지배했던 포르피리오 디아즈(Porfirio Díaz, 1830~1915)는 1860년대 프랑스 제2 제국인 나폴레옹 3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영웅 중 한 명이었으며  당시 프랑스는 멕시코 제2 제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건국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를 황제로 앉혔었다. 포르피리오 디아즈는 멕시코 제국을 제압하고 이를 바탕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인 1876년부터 1911년까지를 포르피리아토(Porfiriato)의 절대 권력 독재 통치 시기라고 한다. 

 

물론 중간에 후안 네포무세노 멘데스(Juan Nepomuceno Méndez, 1820~1894)가 두 달 동안 대통령 직위에 있었으나 그다지 존재감은 없었고 마누엘 곤살레스 플로레스(Manuel González Flores, 1833~1893) 가 1880~1884 동안 대통령으로 재임했으나 마누엘은 디아즈의 정책을 충실히 이어받아 실행했다. 디아즈 정권은 산업을 진흥시키고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였으며 도로, 댐, 철도와 같은 인프라도 구축되었다. 외관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외자 도입으로 인해 철도 부설이 진행되는 등 산업의 진흥과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반면 빈부격차는 극도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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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멕시코 혁명은 1910년부터 1917년까지 지속되었으며 100만 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했다.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의 무장봉기군 사진출처 : BBC News Mundo, Revolución Mexicana: en qué consistió y quiénes fueron los principales líderes

 

디아즈 정권은 근대적인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토지의 등기 제도를 추진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원주민들은 원래부터 토지 소유라는 개념이 없었고 거의 모든 농민은 소유권이 확실하지 않은 마을 공동지에서 경작했다. 디아즈는 '토지제도의 근대화(Modernización del sistema territorial)'라는 명목으로 이와 같은 소유권이 애매한 토지를 정부가 접수한 이후 외국 자본과 대농장주에게 매각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상당수의 멕시코 농민의 대다수가 토지를 잃고 '페옹(Feong)'이라 불린 농업 노동자들로 전락했다. 

 

이처럼 돈을 버는 자들은 대장원을 소유한 '아센다도스'(hacendados)와 같은 부유층 뿐이었으며 도시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디아즈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루랄레스'(Rurales)라고 하는 경찰 병력을 동원하거나 잇달아 선거로 인한 투표들을 조작하는 등 멕시코 역사상 최악의 독재 정치를 펼쳐나갔다. 토지를 되찾기 위한 원주민들은 끊임없이 디아즈에 저항했으나 정부군 및 대농장주가 고용한 사병들에 의해 강제로 진압되었다.


디아스의 폭정에 반대하던 시프리아노 리카르도 플로레스 마곤(Cipriano Ricardo Flores Magón), 엔리케 플로레스 마곤(Enrique Flores Magón), 가스파르 헤수스 멜초르 플로레스 마곤(Gaspar Jesús Melchor Flores Magón) 등 이른바 '마곤 형제'는 아나코-코뮤니즘(Anarco-Communism)을 내세워 멕시코 농민들을 선동했고 이 형제들의 사상을 마곤주의(Magonismo)라 불렀다. 1900년 반(反) 디아즈 신문인 <갱생(Regeneración)>을 출간했지만 디아즈 정권에 대한 탄압이 심해져 1905년 미국으로 망명해야 했다. 

 

또한 마곤 형제를 비롯한 지식인들은 디아즈가 권력을 쥐고 있던 자유당(Partido Liberal)에서 갈라져 1905년 멕시코 자유당(Partido Liberal de México)을 조직하게 된다. 이에 노동자와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멕시코 전국에서 노동조합이 조직되기도 하고 여러 곳에서 파업이 발생했다. 1906년 미국 자본의 소유였던 멕시코 북부 카나네아(Cananea) 구리 광산에서 미국인과 멕시코인 사이의 임금 차별을 이유로 파업이 발발했다. 


디아즈의 후원을 받은 광산 회사 측의 강경 진압으로 인해 45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항구도시 베라크루스에서는 군인들이 파업 중이던 노동자에게 발포해 죽이고 시체를 바다에 던져 상어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그리고 고령에도 권력 욕심을 놓지 못한 디아즈는 1910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고, 당시 윌리엄 태프트(William Taft, 1857~1930)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지원을 약속받기까지 했다. 

 

이 때 디아즈와 대선에서 대항마로 북부 지주 출신의 신흥 대농장주이자 청년 지식인이었던 프란시스코 마데로(Francisco Madero, 1873~1913)가 등장했다. 마데로의 지지세는 34년째 지속된 디아즈 독재 정권에 질린 멕시코 여론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했다. 이에 디아즈 정권은 마데로를 체포하여 투표일을 산 루이스 포토시(San Luis Potosí) 감옥에서 맞이하게 했다. 야당 대표를 탄압한 디아즈는 자신이 압도적인 득표로 재선되었다고 선언했지만 이 대선은 누가 봐도 부정선거였다.

 

선거가 끝나자 석방된 마데로는 미국 텍사스로 망명하여 10월 25일에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을 발표하여 봉기를 호소했고 이에 따라 마데로의 지지자들이 멕시코 북부 도시인 치와와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산 루이스 포토시 계획(Plan de San Luis)>은 무력에 의한 디아즈 정권의 타도를 천명한 무력 투쟁 선언이었다. 미국에 있던 마데로의 주위에는 같은 목표를 가진 멕시코인 동지들이 집결했는데 그 사이 멕시코 국내에서는 마데로에게 동조하는 운동이 차례로 발생하게 된다. 

 

11월 18일에 마데로의 동지였던 아길레스 세르당(Aguiles Cerdán)이 푸에블라 시에 있던 저택에서 무장 봉기에 대한 준비가 발각되면서 경찰에게 구타당한 후 총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멕시코 시티의 남쪽 모렐로스 주에서는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1879~1918)가 무장 봉기를 일으켰고 북부 일대에서는 프란시스코 "판초" 비야(Francisco Pancho Villa, 1878~1923), 파스쿠알 오로스코 바스케스(Pascual Orozco Vazquez, 1882~1915), 베누스티아노 카란자(Venustiano Carranza, 1859~1920), 알바로 오브레곤(Álvaro Obregón, 1880~1928) 등이 차례로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디아즈 대통령의 나이는 80세를 넘겼기 때문에 정치적인 수완은 이전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디아즈 대통령의 측근이 그의 정치를 보좌하는 형국이었다. 멕시코 각지의 수많은 세력들은 '디아즈 타도'라는 목표를 가지고 마데로를 중심으로 규합되었다. 그러나 이는 가장 가난한 계층부터 부유 계층까지 그 성격이 다양하였기 때문에 이는 디아즈를 축출한 후에도 또 다른 내전으로 이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미국의 국제적인 파워 또한 무시하지 않았다. 

 

그는 동생 구스타보 아돌포 마데로 곤살레스(Gustavo Adolfo Madero González, 1875~1913)를 미국에 보내 상, 하원에서 로비 활동을 펼치게 했다. 이를 통해 '트러스트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의 사업가 찰스 란네트 플린트(Charles Ranlett Flint, 1850~1934) 등의 재벌들의 지원을 얻을 수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멕시코의 혁명가들에게 불리하지 못하게 법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의 영향을 끼치게 된다. 북부 지역에서 메히칼리, 시우다드 후아레스, 치와와 등이 혁명군에게 함락되었으며 남부에서는 사파타가 쿠아우틀라를 점령했다. 


이처럼 혁명군의 세력이 넓어질수록 그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혁명군들은 디아즈 축출이라는 목적은 같았지만 하나의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 같은 목표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마곤주의자들은 메히칼리와 티후아나를 포함하는 코뮌 자치정부를 세우면서 가장 먼저 반 디아즈 정권을 창립했다. 그러나 멕시코에서 가장 하층민이 세운 이 자치정부는 디아즈가 물러난 이후 마데로에 의해 진압된다.

 

 혁명을 진압할 수 없었던 디아즈는 자신이 권좌에서 축출로 인해 비참한 운명을 맞이하지 않으려고 결국 마데로와 협상을 벌였다. 그동안 디아즈의 평화(Pax Porfiriato)라는 영광에 안주해 왔던 디아즈 정권에게 전국에서 일제히 봉기하는 혁명군을 진압할 수 있는 군사적인 준비가 전혀 갖추어지지 않았다. 정부군인 연방군은 스페인과 프랑스를 이긴 무적의 군대라는 명성의 이면에 군대 조직에서 장교들의 무능과 부패, 군 지휘부의 노쇠화 등 여러 병폐들을 안고 있었으며 이러한 허점들은 혁명군과의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주요 전투에서 정부군이 잇달아 혁명군에게 패배하고 혁명군이 농촌 지방의 대부분과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비롯한 주요 도시들을 장악하게 되자 지방 군벌, 소농민, 상인, 관료층, 전문 지식인, 자본가 계층이 본격적으로 혁명 운동에 호응하기 시작했고 사태를 관망하던 미국이 점차 혁명군에 우호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1년 5월 21일 체결된 시우다드 후아레스 조약(Treaty of Ciudad Juárez)으로 인해 5월 25일 디아즈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파리로 망명하게 된다. 

 

이처럼 디아즈가 퇴진한 이후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질 때까지 프란시스코 레온 데 라 바라(Francisco León de la Barra, 1863~1939)가 5개월 정도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며 선거에서 마데로가 압도적인 표차를 당선되면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된다. 디아즈의 축출은 멕시코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으로 중남미 최초의 대규모 혁명으로 남미 국가들의 지식인들이 독재정권의 저항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티브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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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의 20세기 역사를 바꿔 놓은 거대한 사건, 멕시코 혁명(Revolución mexic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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