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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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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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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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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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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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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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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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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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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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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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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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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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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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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현재 민족 갈등 우려에도 EU 가입 지속 추진 중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 독일과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복 장관은 2024년 3월 5일에 갑자기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지정학적 필요성(Geopolitical Necessities)’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에 대한 통합과 가입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2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국무총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지위 부여를 축하하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들며 보스니아의 조속한 가입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 유럽 5개국은 지난 2022년 7월 EU 이사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조속한 가입 후보국 지위의 부여와 가입 절차 개시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와 달리 보스니아의 가입에 대한 협상 개시를 망설이는 EU 집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4년 1월 26일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무장관은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코나코비치 장관을 만난 이후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같은 해, 7월부터 시작되는 자국의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과 에너지 및 야망을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통합과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지난 해, 2023년 11월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 인터뷰에서 EU 집행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 가입 요청에 대해 홀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샬렌베르크 장관은 이미 2016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던 보스니아에 앞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가입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EU의 서부 발칸 지역 확장이 지정학적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은 1995년 이후에도 보스니아로부터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편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은 2016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신청서 제출과 2022년 11월 분리주의 성향 도딕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딕 대통령은 1998~2010년 사이 두 차례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2018~2022년 동안 세르비아계의 몫으로 돌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0년과 2015년에 이어 2022년 7월 스르브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3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재임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꾀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도딕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스르브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국방, 사법, 조세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도딕 대통령은 1995년의 데이턴 협정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보스니아라는 단일 국가로 편성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묶어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내 UN 평화유지 활동과 데이턴 협정 이행을 감독하는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 대표는 2023년 10월 도딕 대통령이 데이턴 협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보스니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딕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압력이 거세지자 2024년 1월 8일 로이터(Reuters)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쟁이나 혁명을 통한 분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외세를 배제한 보스니아 내 다른 정파들과는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치권 존중을 주장했을 뿐이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9일 그는 스르브스카 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공화국의 날을 맞이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다시금 보스니아 중앙 정부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 중앙정부는 스르브스카에서 기념하고 있는 공화국의 날을 자국 내 민족 갈등을 조장하는 불법 행사로 규정 및 규제하고 있지만 도딕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날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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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벨라루스의 2020년 시위 당시,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의 변화!(Перемен!)
    벨라루스 2020년 시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1991년부터 동구권에서 울려퍼졌던 민주화의 상징인 노래 Виктор Цой (빅토르 최)의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도 함께 불렸다.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인 가수가 빅토르 최였는지도 모른다. 이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 2020년 유럽에서 마지막 장기집권국가인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시민들, 서유럽식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다시 불려졌다. 이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소련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로마노프 왕조 이후, 가장 최악의 서민 경제 상황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원하는 그 마음을 대신한 노래였다.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Перестройка (뻬레스뜨로이까)와 Гласность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한 직후에 이 음반이 나왔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진 대작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이 노래는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으로 "변화를 원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동유럽의 열망인 개방의 상징인 노래가 된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 "아사"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노래가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노래가 바로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이다. 그리고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0년 후, 이번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벨라루스 경찰당국은 2020년 8월 12일 민스크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뻬레멘!'이 울려퍼지자,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 디제이(DJ)들을 즉각 연행해 갔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반주없이 '뻬레멘!'을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끌려간 DJ들은 풀려난 뒤 내무부 차관급 인사에게 밀실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의 MZ 세대들은 구시대적인 루카센코의 체제에서 벗어나 서방이 추구하는 민주국가로써의 Перемен! (변화)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벨라루스만의 Перемен!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원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특히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뻬레멘(Перемен)을 모든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은 지금 현재, 현 세대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뻬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쎄르짜)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뼤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글라자)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브 나쉠 쓰메헤 이 브 나쉬흐 슬라자흐)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이 브 뿔싸씨이 볜)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믜 쥐둄 뻬레멘)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에릭뜨리췌스끼이 스볫 쁘라달좌엣 나쉬 뎬)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이 까로브까 앗 스삐췍 뿌스따) 성냥갑은 비어버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노나 쿠흐녜 씨님 츠볘뜨꼼 가릿 가즈)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 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에따 스헤마 쁘로스따) 간단한 일이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이 볼쉐 녯 니췌고, 브쎄 나하딧쌰 브 나쓰)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믜 녜 모쥇 빠흐바스땃쌰 무드라스뜌 글라즈)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이 우멜릐미 줴스따미 루끄)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남 녜 누쥐노 브쎄 에따, 취또븨 드루그 드루가 빠냐뜨)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딱 자미까엣쌰 끄루그)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이 브드룩 남 스따노빗쌰 스뜨라쉬나 췌또-따 메냣)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벨라루스 MZ 세대들의 시위가 이웃인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 일부 도시에서도 경제 문제와 더불어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들이 폭발해 반(反) 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세이 나발니 등 몇몇 반(反) 정부, 반(反) 체제인사들은 벨라루스 시위대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했다. 한편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가 성공한다 해도 루카셴코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 분배 정책을 허사로 돌려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국가주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구좌파적인 루카센코의 성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카센코는 현재 무소속이지만 과거에는 급진 좌파정당 소속이였고 현재도 구소련 시기와 비슷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그 문제인데 그러한 정책들이 극우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조지아, 우크라이나는 목적이 반러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도 같은 목표점을 두었던 반면 벨라루스 반(反) 체제 인사, 시위자들도 반러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반러 운동이 목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루카센코의 실각이며 루카센코를 밀어주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가족이자 친척이라 생각하고 동족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이 조지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러 시위와는 다른 부분이다. 물론 벨라루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부를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루카센코를 몰아내더라도 친러 정권을 유지하자는 시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경우 반러감정에다 지역주의가 결합된 경우이지만, 벨라루스는 크게 특정 지역에서 이민족들이 벨라루스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이탈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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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전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배경, 부코바르(Vukovar)에 정착해 있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처우 문제의 변화
    세르비아가 주도하던 구(舊)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 지 20여 년 만에 크로아티아는 여러가지 좋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며, 2012년 1월 22일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 43.58% 중에서 찬성 66.27%로, 마침내 2013년 7월 EU 가입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는 어쩌면 2000년 이후, EU 가입을 통해 진정한 유럽 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던 크로아티아의 계획이 마침내 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EU 가입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에 있어 나타난 여러 장애물들 중 갸운데 가장 껄끄럽고 큰 요인이자 국제 사회에서 우려를 나타냈던 이웃 세르비아와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다. 크로아티아는 EU의 기준에 따라 자국 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권리 보장 및 이들과의 평화적인 관계 복원을 약속하게 되었다. EU는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조약 정신에 따라, 회원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따라서 현재 EU 내 공식 언어만도 크로아티아어를 포함하여 24개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 7월 1일,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소수 민족 주민 수가 3분의 1을 초과하는 지역에서는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자국의 헌법을 개헌하면서까지 그 법령에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옛 우스타샤의 후예들이 정치권에서 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소수 민족들에게 권리를 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연합은 EU에 가입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내부 경제 문제에서 관광업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탈피해 경제 분야의 다변화는 필연적인 부분이라 역설하며 극우주의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대해 부코바르(Vukovar)에 가장 먼저 적용시켰다. 부코바르는 내전 이전인 1990년엔 44,639명의 인구, 즉 크로아티아인 47.2%, 세르비아인 32.3%가 집단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당시 2011년의 통계에 의하면 부코바르 지역의 인구가 27,68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이 중 크로아티아인이 57.37%, 세르비아인이 34.87%를 차지하고 실정이다. 2013년 9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의 공용 표지판 및 공공 기간 현판에 크로아티아의 라틴(Latin) 문자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Ćiril) 문자를 병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코바르에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계 주민 및 크로아티아인들은 그 날 이후로 현재까지 키릴 문자와 서로 병기되어 있는 현판들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이와 함께, 과거 세르비아 민족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던 부코바르 지역 내 주민들을 고려해 EU 요구 조건이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특별존중지역(Područje posebnog poštovanja)’으로 선포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또한 이러한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미 2014년 5월 초까지 크로아티아 전체 유권자의 10%가 훨씬 넘는 65만 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크로아티아의 서명 법에 따르자면, 유권자 10%가 넘는 서명이 이루어질 경우, 해당 내용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계 소수 민족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는 오늘날 세르비아 보이보디나(Vojvodina) 지방과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슬라보니아(Slavonia)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부코바르는 당시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에 의한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와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1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부코바르에서는 약 36,000여 명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약 87일 동안에 걸친 장기간의 포위와 더불어 대량 학살이 이어졌다. 당시 크로아티아 시민군과 민간인 등 약 2,00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약 800여 명은 실종되었고 약 22,000여 명은 유고슬라비아 군에 의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상의 흔적과 아픈 기억은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레스토랑을 비롯, 시 전망대가 있었던 ‘워터타워(Vukovarski vodotoranj)’ 기념비 등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부코바르 대학살의 참담한 기억과 상처는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한 이후, 또 다시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 동안 크로아티아 정부는 EU 가입 전제 조건인 발칸 유럽의 평화 정착을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 및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과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독립 크로아티아의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보 요시포비치(Ivo Josipovic) 대통령의 2010년 2월에 열린 당선 연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언론회견에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정치적 해결의 공감대에 기초해 우호관계 발전을 제안하였고, 비록 크로아티아는 코소보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면서 양국 간 관계를 경색시켰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양국 간 관계 악화가 더 이상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화해 모드를 표방하기도 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인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게도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기를 바라면서 국제 사회와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국익에 부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시키기도 했다. 당시 이와 같은 발표는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국제 사회와 EU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반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및 우타샤의 후예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반발함은 물론이고 부코바르 지역을 비롯해 세르비아와의 내전에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전쟁 피해자들이 거칠게 항의했기에 이러한 국내 내정에 상당한 진통이 이어졌다. 특히 이는 세르비아 측이 크로아티아인 학살에 대해 여태까지 사과와 배상을 한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내부에서 반발이 극심해졌다. 이처럼 내부에서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2010년 4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이 무슬림 민간인 116명을 학살한 아흐미치(Ahmici) 학살 사건과 모스타르(Mostar) 도시 파괴 등을 사과하면 배상을 약속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했던 보스니아 마을(Krizencevo Selo) 또한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추모와 함께 보스니아와의 화해 를 타진히고 미래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요시포비치 대통령의 노력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국경위원회 회의가 자그레브에서 개최되어 그동안 소규모적인 영토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확정하는 협의가 논의되었다. 이어 양국 간 총리 회담 등 여러 고위급 회담 자리로 이어졌고 이 회담들에서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등 양국 간 화해 분위기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자그레브에서 양국 간의 과거 청산을 위한 마지막 절차라 할 수 있는 양국 국무장관 간의 군사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베오그라드에서는 양국의 법무장관이 만나 부패 및 조직범죄에 관한 양국 간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10년 7월엔 요시포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를 방문하여 보리스 타디치(Boris Tadić) 대통령과 회동하였고, 회담에서 양국 피난민의 자유로운 입국을 허용할 것과 각 영토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인정하고 문화재 반환 등 과거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관한 청산 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화해 무드는 경제적인 교류 확대와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0년 이후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내 투자 규모 6위로 상승하였으며, 단절 이후 교역량이 8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거 이어졌다. 또한 이는 크로아티아 기업들의 세르비아에 대한 투자 확대로 이어졌고, 2011년 약 10억 유로 이상이 세르비아에 투자되는 등 양국 간 경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화해는 과거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슬로베니아 기업들과의 상호 투자와 교역 관계로 이어지게 하고 있으며, 국영 철도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건의 협력을 증진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간의 화해 무드는 2010년 11월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가장 큰 전쟁의 피해를 입었던 부코바르를 방문하여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했다. 이어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것까지 발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 학살에 대해 당시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졌다. 이에 양국 간 과거사 극복을 위한 우호 관계 증진의 노력이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는 것에서 이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진정한 평화적 토대를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하지만, 부코바르의 키릴 문자 공용 표기를 둘러싼 갈등의 경우와 같이, 힘들게 발전시켜 온 양국 간, 양민족 간 화해와 평화 무드는 크로아티아가 EU 가입이 확정되면서 모두 깨졌다. 이와 함께 2014년 3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국가가 내전을 벌이면서 이루어진 여러 학살 행위를 인종 학살로 규정하고 크로아티아 측이 세르비아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고소했으며 이에 세르비아도 그동안의 화해를 깨고 크로아티아에 맞고소를 하면서 재판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불어온 발칸의 훈풍은 차가운 냉방으로 바꼈다. 크로아티아는 지난 2014년 ICTY 제소 내용을 토대로 세르비아가 지난 1991~1995년 독립전쟁의 기간 동안 약 2만여 명의 크로아티아계 민간인 학살과 인종 청소를 주도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이에 대응해 같은 해 하반기 때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를 ICTY에 제소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민병대가 저지른 인종 학살과 더불어,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포로 구금 상황이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 정권이었던 우스타샤(Ustaša) 정권에서 자행된 나치 강제 수용소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향후 부코바르 문제를 비롯해 양국 간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발칸 유럽 지역의 평화는 요원하다. 특히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 충분 조건을 지키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를 이용한 셈이나 마찬가지니 세르비아 입장에서 그 분노와 배신감은 컸다. 크로아티아 EU 가입 문제, 그로 인해 크게 알려지 않았던 잠시 동안의 세르비아와의 화해와 EU 가입 직후, 태도를 바꿔 세르비아를 배신한 크로아티아 이야기, 두 나라는 서로가 멸망해 없어질 때까지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는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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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여러분들이 모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진다. 이에 국가 내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사이에 민족주의 감정이 대두되면서 혼란이 찾아오는 위기가 계속 있었지만 요시프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국가 해체로까지 이어진다. 티토는 그동안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오며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코소보에서 폭력 사태가 분화하기 시작하면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티토가 후계자를 직접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의 1당 독재 체재를 유지하면서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된다. 그러나 이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생전의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인한 수정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미소 냉전으로 구분되던 양 진영에서 벗어나 제 3세계를 주도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 진영이든, 공산 진영이든 어디든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티토의 이러한 제3 세계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자유 세력들과 공산 세력이 공존했던 곳이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방과의 경제 교류와 문화 교류 등등으로 인해 이미 자유 진영과 상호 신뢰를 구축해 놓았다. 반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나 중공, 북한과의 연계성을 통해 그들과 가까웠고 보스니아의 경우,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알바니아, 터키와 관계가 깊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까지 교역이 가능했던 국가였다. 이러한 체제들을 모두 수용해서 하나로 묶었던 것이 티토였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은 유능한 지도자가 있을 때, 뜻을 함께하여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그 유능한 지도자 죽고 없어진 상황에 사후 대책도 수립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이라면 서서히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즉, 연방을 걷어 치우고 각자도생의 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발호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개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는 기존의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슬라브권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그 민족주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구심점은 제각기 달랐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구심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이탈리아계 슬라브인의 비중이 80%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군이 달마티아 해안가와 슬로베니아 본토를 장악하면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군이 철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어도 이들 이탈리아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며 남슬라브계와 혼혈한 2~3세대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되어갔다. 이렇게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이탈리아계가 되어가다보니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와는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형태를 띄워갔다. 게다가 종교도 카톨릭이고 슬라브계가 주축인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는 정교회였다. 단 보스니아의 경우, 알바니아계와 터키계, 무슬림으로 개종한 슬라브계가 뒤섞인 이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다보니 이 이질적인 형태의 민족주의에 구심점은 종교가 자리잡으니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세르비아계를 늘 도와줬던 소련의 경제가 휘청였다. 소련이 어려워지니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자 여기에 슬슬 자유진영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라자르 콜리셰프스키(Лазар Колишевски)가 티토를 승계하게 되자 여기에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의 정권 중앙집중화를 노리고 콜리셰프스키의 하야를 요구하자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자는 국가의 지방분권화를 원하며 자그레브와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서서히 분할의 조짐이 보이자 집단 서방과 미국은 냉전 시기 막판에 승기를 잡으며 공산 진영에 대한 우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내정에 서서히 개입하게 된다. 우선 당시 집단 서방은 프랑스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슬로베니아 대표를 맞고 있는 밀란 쿠찬(Milan Kučan)을 만났다. 류블라냐에서 벌어진 미테랑과 쿠찬의 회동은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슬로베니아가 이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다음으로 접촉한 인물이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인의 처우에 대해 비판하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가 티토의 눈 밖에 나서 투옥된 인물이다. 투지만은 이때부터 독립 크로아티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투지만은 우선 캐나다로 가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만났다. 이 때 미국, 캐나다, 영국의 정치인들과 접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게 되면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고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들을 차례대로 독립시켜 소련을 붕괴시키는 작업에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동유럽 내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들을 들 수 있다. 특히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 강력한 태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약화되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해 자신들이 발칸에 진주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독립국가연합을 서서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이다. 티토가 만든 제3 세계의 정책은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이후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온 투지만은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도 민주화를 결정하고 각 공화국 별로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흐름에 맞춰 1989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창당하여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때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들의 지원을 받았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또한 미테랑의 지지를 받아 1986년 5월에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표가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하며 독립전쟁을 벌인다.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국토방위군 등으로 게릴라 전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유고 연방정부는 고작 개전 10일 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10일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유고 연방군은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도 없었던 것도 있지만 크로아티아 내에서 투지만을 중심으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후방에 문제가 생겨 연방군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분리 독립을 꾀했고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 결과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 찬성이 결정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같은 날인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이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다. 1991년 7월 10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17일까지 독립 선언을 연기한다는 조건 하에 일단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중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보스니아에서 터졌다. 앞선 1년 전 보스니아는 최초로 다당제 총선이 열었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의회에서 공산당이 축출되고 3개 민족을 기반으로 한 민족 정당이 의회를 장악한다. 이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선언을 하는 가운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계속 유고 연방에 존속해 있으면서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계속 존속할 것인지, 그리고 보슈냐크 무슬림들과 보스니아에 남아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독립을 요구했기에 독립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10월 24일, 세르비아계를 기반으로 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국민의회 위원이 사라예보의 국민의회를 포기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의회로 합류하면서 1990년부터 시작된 3개 민족 연합 통치는 완전히 붕괴했다. 1992년 1월 9일에 세르비아계 의회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로부터 독립했고 1992년 8월에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스니아는 이후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지에 대한 결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열었다. 이 국민투표는 대다수의 세르비아인이 보이콧하면서 일방적인 형태로 변했고 99.7%로의 득표율로 독립이 확정되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2일에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인들로 인해 보스니아 전국에서 긴장이 조성되었고 1992년 3월 7일 세르비아 민병대가 카프리냐 주위의 보스니아인-크로아티아인 마을을 공격하야 살인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3월 15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Bosanski Brod)와 보스니아인 마을 고라즈데(Goražde)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소규모 공격이 자행된 이후 3월 19일에는 아드리아해 항구인 네움에 세르비아계 포병들 포를 사격하여 공격이 이어졌고, 24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 30일에는 비옐리나에서 전투가 시작되면서 4년에 걸쳐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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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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