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7(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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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를 프랑스어로 재해석한 이름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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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마리 앙투아네트 12세 때의 초상, 출처 : 위키백과,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14세에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얼마 후 남편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던 실로 당시 드물게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길로틴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창의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온갖 혐의를 쓰고 갖은 중상 모략을 당했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시민들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이었지만 놀랍게도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죄목 하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근친상간의 혐의였다.


이는 본인의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장남인 루이 조지프는 8세에 죽었고 차남인 루이 17 또한 당시 재판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8세였다. 즉, 어머니가 8살의 아이를 겁탈했다는 얘긴데 지금 들어도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 위한 억지 죄목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7세의 변론과 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죄목 및 당시 재판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포스팅하고자 한다.


이미 그녀의 어떤 변론과 증언도 이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사형이라는 처결을 결론 지어 놓고 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상당한 양의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파리 군중들에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처형하기 위한 정당성, 국민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후대에 창작한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왕비로써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로부터 국제적인 이득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자신의 친모 및 친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22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 앙트아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 루머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 군중들은 왕비를 왜 마녀로 만들었을 정도로 증오했을까?


첫 번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를 연결시키려는 정략결혼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승계한 국가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력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인데 이는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보다 상류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정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에 대한 사실적인 부분보다는 각종 정치 선전성 루머에 의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었다. 이는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는데 이는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의 타락, 그로 인해 테레지아와 앙투아네트가 그를 멀리하자 그에 대한 앙심으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여 이 사건을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작된 루머는 진범이 앙투아네트이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재판에서 이 사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고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당시에 시대상을 지배했던 상류층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일본의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이와 같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의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生涯)』를 집필하면서 이 혁명재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자였고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하면서 그녀를 풍자했다. 대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제목만 보아도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인 장교를 비롯하여 자신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역사적 근거와 별개로 그녀를 성적으로 음탕하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로 몰고 갔다. 여기에 발기 불능인 국왕 루이 16세를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존재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수위의 성희롱을 3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고증과 전혀 상관없는 가십용 거리로 전락한 앙투아네트의 모습과, 네티즌들이 온갖 악플 및 악의적이고 근거없는 가십거리로 루머를 만들어 퍼트려 몇몇 여성 연예인들을 자살로 이끌게 만드는 요즘과 별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워 이를 기정 사실로 덮어 씌우고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 때문애 그녀를 희생시켰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그녀는 단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요즘과 같이 MZ 세대가 대두되고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별 대립 및 성 차별 등등의 각종 양극화적 논란으로 볼 때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 재판은 지금의 관점과 비교하여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였고 상류층, 부르주아 혐오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으며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 된 사회와 매우 유사한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시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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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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