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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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흐무드의 연이은 서북 인도에 대한 침입으로 펀자브 지방과 카나우즈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카나우즈는 마흐무드의 철수와 함께 회복되었으며,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찰루키아와 라지푸트의 위상을 계승하려는 가하다발라(Gahadavala) 등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계속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비하르(Bihar) 지방은 남방 기원의 종족인 타밀계 카르나타카(Karnataka)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칼라츄리(Kalachuri)는 자발푸르(Jabalpur) 근교에 있는 트리푸리(Tripuri)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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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Mahmud of Ghazni at his court (center) receives a robe from Caliph Al-Qadir; painting by Rashid-al-Din Hamadani, Jami' al-tawarikh, 1306-1314. 사진출처 : WIKIPEDIA, Ghaznavids

 

벵골은 세나 왕조의 지배하에서 일시적인 번영을 이루었으나, 결국 13세기 초에 투르크계의 장군 무함마드 할지(Khalji)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라지푸트 족들은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서 서로 간에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일개의 왕국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웃의 국가들과 계속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전쟁은 무사들 규범의 일부가 되어 남았다. 파라마라는 말와에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솔란키는 카티아와르를 주변으로 구자라트에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찬델라(Chandella)는 파라마라와 칼라츄리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데 여념이 없었으나, 결국 12세기에 차우한에게 점령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구힐라(Guhila)는 메와르(Mewar)와 오늘날의 우다이푸르(Udipur) 주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으며 또 다른 라지푸트 족인 카치차파가타(Kachchhapaghata)는 괄리오르(Gwalior)와 그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델리의 토마라 왕국을 지배했던 차우한은 여러 차례 강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력을 유지했다. 차우한 왕국의 마지막 왕인 프리트비라자 3세(Prithviraja III)는 카나우즈의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그녀와 결혼하게 된 낭만적인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음영 시인인 찬드 바르다이(Chand Baardai)가 저술한 장편 서사시 <프리트비라자로소(Prithvirajaroso)>는 이 사건을 잘 언급해 주고 있다. 카나우즈의 왕은 공주의 사위를 고르기 위해 그의 궁정으로 인근 여러 나라의 왕자들을 초청했다. 그녀는 그 피로연 장소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당시에 카나우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용감한 프리트비라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말았다. 카나우즈의 왕은 프리트비라자를 욕보이기 위해 그를 일부러 연회에 초청하지도 않았으며, 연회장에 나타난 그를 문지기가 서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그러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카나우즈의 공주는 모여 있던 모든 왕자들을 마다  하고 동상의 목 주위에 있는 화환으로 눈을 돌렸다. 신하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프리트비라자는 그 근처에 숨어 있다가 공주를 가로 채 그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 결혼했지만 영원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구르 왕조 무함마드기 인도 서북방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프리트비라자는 그와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북인도는 오랜 기간 동안 외래의 종족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았다. 에프탈 훈족의 침입으로 인한 충격은 거의 잊혀졌으며, 아라비아의 간헐적인 습격도 쉽게 퇴치되었다. 본격적인 아라비아의 침입이 있기까지 거의 4세기 동안의 세력 다툼과 전쟁이 인도 내부 각 왕국 사이에서 일어났고 매우 치열했었다. 각 왕조의 재력과 국력을 탕진시키는 끊임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여러 군소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갔다.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날로 점증하는 지역적인 문제에 고심했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차츰 좁아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와의 무역은 감소되었고,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던 인도의 부는 차차 줄어들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를 향해서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11세기에 이르러 그 첫 번째의 타격을 입게 된다. 인도의 북서쪽에서는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공국(公國)이었던 가즈니(Ghazni)는 투르크계의 귀족들이 중앙아시아 변경 지대와 사히야 왕국의 일부 지역을 합병했던 977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부터 21년이 지난 후 가즈니의 제7대 왕 마흐무드(998∼1030)는 중앙아시아에 가즈니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쏟아 부으며 정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인도에 대한 마흐무드의 관심은 인도의 재부와 힌두쿠시 산맥의 황량한 지역보다 기름지고 풍성하며 비옥한 펀자브 지방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상황은 인도보다는 중앙아시아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흐무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인도 침입은 우연적인 일이며 주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 지중해 연안 국가와의 무역이 계속적으로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북인도보다는 투르키스탄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은 인도의 부(富), 특히 귀금속의 탈취와 노예 획득에 있었고, 인도에서 원정하여 돌아오는 시간도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원정하는 것보다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마흐무드의 정복 전쟁은 거의 해마다 거듭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15~17차례나 인도를 침입하여 정복 전쟁의 화신(化身)으로 불릴 정도였다. 1000년에 사히야의 왕 자야팔라(Jayapala)를 격퇴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세이스탄(Seistan)을 점령했다. 1001년에는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자브 지방을 다스리던 힌두의 왕과 페샤와르에서 격돌하여 그를 철저히 유린하고 포로로 잡았다. 1004∼1006년 동안에는 인더스 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인 물탄(Multan)을 여러 차례 공략했다.


1008년에 마흐무드는 다시 펀자브 지방을 공격하여 이듬해까지 6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 당시 마흐무드와 힌두의 양 군대는 페샤와르 평원에서 또 다시 격돌했다. 이 전투는 둘 다 12,000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그 처참한 광경은 극에 달했다. 이 전쟁에서 인도군은 대패하여 인도 깊숙한 곳으로 가즈니의 군대가 침입해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나아가, 마흐무드는 구르(Ghur, 가즈니와 아프가니스탄의 중심부 사이에 있는 지역)의 지배자들과도 자주 전투를 벌였다. 분명히 마흐무드의 군대는 기동성이 있었고 용맹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매년 각각 다른 지역의 침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복 전쟁의 용의주도함은 농업 수확기를 맞이한 인도 땅에서 늘 나타나는 마흐무드 군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해당 지역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세금을 받아 내기보다는 군대의 기동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재부를 탈취한 이후 다시 가즈니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인도의 사원은 현금, 금화, 그리고 귀금속 등의 많은 재부의 보고였다. 그래서 사원은 부를 찾는 비(非) 힌두교도들의 지극히 당연한 목표물로 되었다. 마흐무드의 금에 대한 욕심은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1010년부터 1026년까지의 마흐무드의 침입은 사원 도시인 마투라, 타네사르, 카나우즈, 솜나트(Somnath) 등에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 솜나트는 가장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사원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솜나트 점령은 불가피한 귀결로 되었다. 부를 획득하는 것 이 외에도 종교적인 동기도 있었다. 신상을 파괴하는 것은 열렬한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우상을 척결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솜나트 사원의 파괴는 광란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인도인의 마음속에는 수 세기 동안 그 마음의 상처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고, 이는 또 마흐무드의 평가를 크게 윤색시켰다. 솜나트 사원에 대해서 13세기의 아라비아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솜나트 - 바다의 연안에 있던 아름다운 인도의 도시에, 카티아와르 반도의 조파(潮波)가 만든 신성하고 미려(美麗)한 힌두 사원이 있다. 매일 1,000명의 브라만이 제사를 드리고, 300명이 근무하는 이발소가 있어 사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이발을 해 준다. 500명의 무녀(巫女)가 링가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사제인 브라만들은 인근 10,000개가 되는 촌락에서 기부금의 형식으로 착취한 지세(地稅)로 생활하고, 링가는 750㎞ 떨어진 갠지스 강에서 운반된 성수(聖水)로 매일 깨끗하게 닦여졌다. 사원은 수많은 보석을 재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 (중략)······.


이슬람 군은 1024년에 이 사원을 철저히 파괴했다. 힌두교 시바파의 성물(聖物)인 링가(男根)를 부수고, 그 일부를 가즈니로 가져가 이슬람 사원 입구에 깔았으며 매일 기도드리러 오는 이슬람교도들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마흐무드는 1030년에 사망했다. 신상 파괴와 연례적인 침략자로 연상되는 그의 죽음은 북인도의 주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인도인과 힌두교에 무자비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슬람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했다. 가즈니에서는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었고, 그가 세운 모스크(Mosgue)들은 당시의 이슬람 건축에 있어서 최고로 발달된 모습을 보여 준다. 마흐무드는 크와라즘(Khwarazm)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알베루니(Alberuni)를 그의 왕실로 데려왔다. 알베루니는 마흐무드의 명령에 따라 인도에서 10년을 보냈는데, 그가 저술한 인도에 관한 책인 <타키키 힌드(Tahqiq­-Hind)>라는 책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인도 문화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마흐무드의 인도 침입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었으며 서북 인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힌두의 여러 국가 간에 동맹 관계는 형성되었지만, 인도 대륙, 심지어는 북인도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군에 대한 방어는 위험에 처한 왕을 도와주는 일회적 목적만을 수행하는 데 불과했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마흐무드는 사카와 훈족과 같은 외래 민족의 침입자였다. 이들 외래 민족들은 한 때 북인도의 정세를 흔들어 놓았지만, 곧바로 망각의 상태로 흘러갔으며, 이는 마흐무드의 군대도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흐무드가 사망함으로써 북인도의 여러 국가는 서북쪽을 방어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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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지배한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와 북인도로 이슬람의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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