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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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영국에게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집트에서 전 아랍을 대신하여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이다. 메흐메트 알리는 현 그리스 영토인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카발라에서 알바니아인 상인 집단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타고난 상업 실력으로 숙부에게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카발라의 징세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뒤이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자 숙부에 의해 이집트를 재점령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된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제국군 용병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집트에 온 알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집트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완벽히 평정한 공으로 1805년 오스만 술탄인 셀림 3세로부터 이집트 태수 자리를 임명받게 된다. 

 

이후 알리는 이집트 군벌로 군림해 온 맘루크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만의 절대적 권력을 강화해 사실상 국왕으로 군림했다. 알리는 총독직을 세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반기들어 오스만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로 인헤 이집트의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이집트 역사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이라 여기며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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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Mısır Valisi, Kavalalı Mehmet Ali Paşa, 출처 : WIKIPEDIA, Muhammad Ali of Egypt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긴 했었으나 오스만과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세력을 겨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맘루크 왕조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맘루크들이 반 자치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직접 파견되어 온 태수한테 반항적으로 굴면서 그들의 세를 과시했고 이에 굴복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켜 태수를 궁지에 모는 등,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아주 큰 근심거리였다. 

 

특히 1760년대 들어서 알리 베이 엘 케비르(Ali Bey El-Kebir)와 그의 부관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가 연이어 국가의 원로 직위인 '셰이크 알 빌라드' (Sheik Al Bilad) 직위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였고, 오스만 조정이 보낸 총독의 권력은 유명무실 할 수밖에 없었다. 1768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알리 베이와 팔레스타인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Zahir Al Umar)는 러시아 제독 알렉세이 오를로프(Алексей Орлов)와 동맹을 맺어 본격적인 반란에 나서기도 하였다.


1772년 알리 베이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축출하고 집권한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는 오스만 정부와 타협했으나 교섭이 이어지는 도중인 1775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부하들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알리 베이의 심복이던 이스마일 베이와의 내전을 벌인 끝에 1778년 연립 정권을 세우며 대놓고 오스만 정부와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맘루크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집트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일은 당시 쇠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786년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반란을 진압한 유능한 제독인 하산 파샤 휘하의 부대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함대를 보내 이집트를 장악했고 이스마일 베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듬해 재차 러시아와의 전쟁이 터지며 오스만 제국 군이 러시아와의 전장으로 철수하자 1791년 무라드 & 이브라힘 베이의 연립 정권이 부활하게 된다. 그런데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와 맘루크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차지했지만 이어 영국군에게 밀려 나폴래옹의 군대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고 영국군 역시 얼마 안 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무주공산이 된 이집트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맘루크가 쇠퇴한 틈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정부와 이집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맘루크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마침 이집트에 와 있던 메흐메트 알리에게 있어 이집트의 권력 공백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알바니아인 용병들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이와 같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이용하여 알리는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토착 지배층이었던 맘루크의 숙청 과정은 먼저 자신이 약탈을 연출했고 이를 통해 울라마, 상인, 민중을 선동해 맘루크를 그들 스스로 추방하게 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 행정부가 임명한 이집트 태수의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이 이끄는 알바니아인 부대를 이용하여 이집트 전역에 조세 행정부를 설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알바니아인 부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동시에 알바니아인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에 자신이 몰아냈던 맘루크들에게 환영식을 열어준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숙청한 후,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몽골군의 침공 이후 이집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맘루크 계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집트 태수가 된 알리는 맘루크와 친 오스만 계파들을 동시에 숙청한 이후 알바니아 인 혈족과 이집트 현지인을 고용해 가신으로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정권을 강화했고, 동시에 자신의 영지가 된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이집트의 주요 수자원인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농민들을 동원해 면화와 곡물 재배에 투입하며, 무역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 차익을 서구식 인프라와 교육, 산업, 보건, 국방 등에 전면적으로 투자하여 이집트를 근대화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서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장교까지 초빙해 이집트 군의 훈련을 실시하면서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코스탄티니예의 오스만 중앙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에게 세금을 바쳤다. 비록 한 때 콥트어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면서 오스만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알리의 군사력과 이집트에서 코스탄티니예로 들어오는 안정된 세입이 있었기에 알리를 용인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이집트의 성과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오스만 행정부도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지만 이집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메흐메트 알리의 강압적인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일 강 정비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관세로 이집트의 산업을 보호하며 성장시켰으나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강제 동원된 자들이라 이들의 원성은 실로 대단했다. 의무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리는 반인권적인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으며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력의 뒤에는 인구의 약 2.6%를 열악한 처우의 군대로 강제로 동원하는 등, 비인간적인 징병까지 존재했다. 

 

징병 명령에 대해 저항하기라도 하면 메흐메드 알리는 이들을 유혈 진압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심지어 병역을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모아 장애인 부대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게 되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4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와하브파의 등장은 칼리프 칭호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가까운 이집트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는 메흐메트 알리에게도 충분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또한 오스만 정부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오스만 정부의 호의를 얻어 정치적인 입지를 견고히 구축할 수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미 쇠퇴를 시작한 오스만 제국이 일개 오지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자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오스만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공백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불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의 명령을 받들어 와하브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알리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이브라힘 파샤는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곧바로 이집트 진압군은 사우드 가문의 근거지인 네지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메흐메트는 후일 반란의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 여에 걸친 추격전 끝에 사우그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완전히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조용히 혈통을 이으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우드 가문은 이집트에 대한 원한이 강한데 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헸다. 당시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음 공격 목표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했으며 손쉽게 제압이 가능한 곳이었다. 1820년 알리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 군은 센나르 술탄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되었고 이집트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수단도 함께 영국의 식민지로 합병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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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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